2021. 6. 15. 16:41ㆍDAILY LIFE STORY
조선시대 말기 그리고 대한제국 시절은 외세의 간섭이 있던 시대로 특히 일본의 대한제국의 침탈은 뼈아픈 역사이다.
그리고 무능하고 너무 허약했던 대한 제국의 모습은 사람들은 떠오르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그때의 역사를 되돌아보기 싫어하고 애써 외면하려고 한다.
그 예로 경술국치가 몇 년도 인지 알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의외로 대답을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만큼 관심을 가지려고 노력하지 않고 애써 외면하려고만 한다.
우리는 받아들이기 힘들어도 그 당시의 역사도 우리의 역사로 가장 우선적으로 기억해야 할 역사이다.
우리나라는 제국주의 시절에 탄력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무조건적인 쇄국정책이 오히려 조선을 근대화에서 멀어지게 하였다.
그리고 국제정세는 러시아의 남하정책이 계속되어 하얼빌, 연해주를 거쳐 계속 남하하려 하였고 이를 막아야 하는 영국은 우리나라의 거문도를 불법 점거하기까지 이르렀다.
결국 영국은 일본을 이용하여 러시아를 막기로 결정하여 일본과 동맹을 맺고 더욱 빠르게 일본을 무장시켜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막으려 하였다. 일본도 영국을 등에 업고 청, 러시아와 싸워 이김으로써 조선에 대한 기득권을 가지게 된 것이다.
세계의 정세가 태풍이 휘몰아치듯이 요동치는 이때 고종 황제도 뒤늦은 근대화에 힘을 쏟았다.
우선적으로 군대의 근대화에 노력하여 신식군대를 창설하여 이를 확대하려 하였다. 그리고 전기, 통신, 교통에 있어서도 근대화의 노력하였으나 외채 및 채굴권 등으로 자본을 매우기는 부족할 뿐이었다. 그와 함께 국제 정세는 이미 정리가 되어 청과 러시아를 제압한 일본에게 강제로 병합되는 치욕을 당한 것이다.
1902년 고종황제는 제국익문사를 설립하였다. 제국익문사는 한성에 사무소를 가지고 있고 일간지를 발행하는 언론사로서 국내외 소식을 매일 발행하고 긴요한 서적도 인쇄하였다.
그러나 이 언론사의 모습은 대외용 모습이었다. 실제 제국익문사는 황제 직속의 정보기관이었다. 오늘날 국정원 같은 성격이다. 제국익문사의 주요 업무 중 하나는 고종의 밀서를 외국에 전달하는 일이었다. 때문에 철저한 보안이 필요로 했기 때문에 영화에 나오는 변장술에 능한 사람들이었다.
지역을 구분하여 담당을 정했는데 크게 국내담당, 해외담당으로 나뉘고 국내의 경우는 상설 통신원의 서울과 각 지방의 주요 도시 담당, 보통 통신원으로 서울 담당, 특별 통신원으로 외국의 공사, 일본의 군사, 항만시설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해외담당의 경우는 해외정책 조사 및 도주한 범죄자를 조사하였으며 도쿄, 상하이, 오사카, 나가사키, 베이징, 블라디보스토크의 6개 도시에 나가 있었다.
기타 활동에 대해서는 임시 통신원이 있었다.
해외 정보는 72개로 분류되어 있었지만 당시 시대가 시대이다 보니 일본에 대해서만 16 부문에 이르렀다. 조사 내용은 일본군의 동향, 일본 경찰, 정치인, 사회 등 다방면에 걸쳤다.
제국익문사는 을사늑약을 무효화하기 위한 활동과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이후 안중근 의사의 관할 권한을 일본에서 러시아 법정으로 옮기려는 시도도 있었다고 한다.
제국익문사가 황제에게 보고하는 방법은 화학비사법을 통하여 보고하였다고 한다. 화학비사법은 과일즙이나 화학약품으로 글씨를 써 보이지 않도록 하고 읽을 때는 열이나 화학 약품을 통하여 읽을 수 있는 방법이다.
황제의 밀서 전달과 일본 관련 정보수집이 주된 업무였던 제국익문사는 1920년 경술국치 직후 일제강점기까지 독립운동 비자금 조달 및 순종의 옆에서 외부의 상황을 알리기도 하였으나 결국 발각되어 1920년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다.
제국익문사의 자세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보안이 유지되는 업무이므로 문서화되어 있는 것이 많지 않고 덕수궁 화재로 인하여 많은 서적이 불탔기 때문일 수도 있다.
몇 년 전 "미스터 선샤인"이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그 드라마에서 제국익문사의 통신원 관련 장면이 잠깐씩 나온 적이 있었다.
제국익문사가 직접적으로 언급되거나 그 비중이 크지는 않지만, 극 중에서 글로리 호텔의 사장 쿠도히나가 제국익문사의 통신원이었다.
제국익문사 장면은 드라마 초중반 쿠도 히나가 고종 황제로부터 전달된 봉투 속 문서를 읽고 태워버리는 장면. 그 문서에는 조선의 황실 문양과 함께 '성총 보좌'라는 인장이 찍혀있었다. 또한 쿠도 히나가 유진 초이를 찾아가 "궁에서 기별이 와 전달한다. 비공식적으로"라고 말하는 장면이나, 궁내부 대신 이정문에게 은밀하게 지시를 받는 모습도 제국익문사와 관계가 있다.
이렇게 격동하던 시대의 정확한 정보가 고종황제에게는 필요했다. 그래서 제국익문사를 설립하여 황제의 대한제국의 안위를 위협하는 것과 관련된 다양한 정보수집을 적극적으로 하였을 것이다.
고종은 제국익문사를 통하여 대한제국의 안위를 위하여 다양한 일을 하려 하였으나 한계가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해외 통신원의 경우도 조선과 근접한 나라와 도시에 통신원을 보냈을 뿐 유럽이나 미국에 통신원을 확대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수집되는 정보도 제한 적이었을 거라 생각이 된다.
대한제국 시절에 이와 같은 황제 직속 정보기관까지 창립했다는 사실이 대한제국이 새롭게 느껴진다.
제국익문사의 의미는 단순한 정보기관의 성격을 떠나 대한제국의 자주성을 상징하며 이 격변하는 시대를 어떤 식으로도 헤쳐나가려는 고종황제의 의지를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난 후 세계열강은 대한제국의 병합을 묵인하는 상태가 된 것이다. 그렇게 우리나라의 암흑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당신은 경술국치가 몇 년도인지 알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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