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5. 26. 17:44ㆍMARKETING STORY
우리나라는 쌀이 풍족한 나라가 아니었다. 쌀을 생산하여 국민도 먹어야겠지만 전쟁에 대비한 군량미도 필요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다들 알겠지만 오래된 정부 비축미를 시중에 유통시키는 정부미라는 것도 있었다.
박정희의 대통령 시절인 1965년에는 쌀막걸리 제조가 금지되어 결국 1990년이 되서 금지가 풀렸다. 그래서 당시에는 밀가루나 옥수수로 막걸리는 제조했었다. 그리고 박정희 시절 전 국민에게 혼분식장려 운동도 하였다. 학교에서는 도시락 검사를 하고 가정에서도 혼식을 많이 했었다. 나도 어릴 적 매주 토요일 점심은 어머니가 삼양라면을 끓여서 온 식구가 먹었던 기억이 있다.
이렇게 쌀이 부족했던 시절 라면은 국민의 중요한 먹거리로 자리 잡았다.
삼양식품은 일본에서 라면제조 기술을 힘겹게 얻어 1963년 삼양라면을 출시하게 되었다.
국내의 소비자들에게 라면이라는 카테고리를 만들고 유일한 식품회사로 자리 잡은 것이다. 그러나 초기에는 소비자들은 무슨 실 같은 것을 어찌 먹으라는 거냐는 생각을 하는 등 거부감을 가져서 판매가 저조했다. 삼양식품은 거의 7여 년 동안 수많은 시식회, 캠페인을 통하여 라면을 소비자의 마인드에 각인시켰다. 그렇게 삼양라면은 라면시장의 80% 이상을 독식하며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이때 롯데공업에서 이름을 바꾼 농심의 회심의 일격이 있었다. 그건 바로 "너구리"의 출시였다.
아무리 노력해봐도 선도자의 법칙이 적용된 삼양라면을 넘어설 수 었었던 농심은 전략을 바꾸었다.
1982년 소비자의 마인드에 새로운 카테고리를 만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동 카테고리였다. 그렇게 우동맛 라면을 만들고 소비자에게는 우동이라 소구 했던 것이다. 그래서 순한 맛 너구리 우동이 먼저 출시되었다. 그리고 공식 명칭도 너구리 우동이였다. 소비자가 라면이라 인식하면 삼양라면과 이미지 싸움이 되기 때문에 너구리 우동이라 명명한 것이다.
진정한 우동은 아니지만 라면 카테고리에 질린 소비자들에게 우동이란 카테고리는 매력적이었다. 즉각 매출로 이어졌다. 출시 두 달 만에 20억 원을 넘기더니 다음 해인 1983년 150억을 돌파하였다. 이렇게 너구리 우동은 대박 상품이 된 것이다. 이렇게 소비자의 마인드에 우동이란 컨셉을 각인시킨 후 제품명에서 우동을 빼고 너구리로 통일하게 되었다. 다시 라면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소비자는 너구리는 라면과 다른 것이라 인식하게 되었다.
그럼 왜 이 라면의 이름은 너구리일까? 라면, 우동이랑 전혀 안 어울리는 이름이다.
그 이유는 우동의 천국인 일본에서 찾을 수 있다. 일본의 시코쿠섬이 우동으로 유명한데 시코쿠에 가면 우동대학도 있고 버스를 타고 우동 성지를 돌아다니는 여행코스도 있다고 한다.
다시 돌아와서 일본의 유명한 우동중에 "타누키우동(タヌキうどん)"이 있다. "タヌキ(타누키)"는 너구리라는 뜻이다. 일본인은 너구리에 대하여 대단한 애착이 있는 것 같다. 인형, 피규어, 만화 등 많이 등장한다. 여하튼 이 너구리 우동은 "타네누키" 즉 속 빈 튀김 조각들을 고명으로 얹어주는 우동이다. 타네누키를 줄여서 타누키라 부르게 되었고 타누키우동(タヌキうどん)이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농심은 이 우동의 레시피를 카피하여 흉내를 낸 라면을 만든 것이 너구리 우동 이였다. 너구리 우동의 출시 당시에는 튀김 조각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궤도에 오르고 난 후 스리슬쩍 없애버렸다.
혹자는 시코쿠섬에서 쫄깃한 면발로 유명한 우동인 사누키 우동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얼마 전에 돌아가신 농심의 신춘호 회장과 회의 중에 사누키 이름을 타누키로 부르면서 너구리가 되었다는 말도 있다.
내 생각에는 후자는 나중에 만들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타누키우동의 레시피를 카피하여 만든 라면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어서 이런 이야기를 만들고 최초의 튀김 조각도 빼 버리고 제품명도 "너구리 우동"에서 "너구리"로 변경한 것이란 생각도 든다.
이렇게 농심의 삼양 넘어서기 전략은 제대로 적중한 것이다. 결국 입지가 굳건한 상대를 상대하기 위하여는 정면승부보다 측면으로 돌아 펀치를 날려가 승산이 있는 것이다. 소비자에게 우동이라는 카테고리를 만들어 그 카테고리를 선점하므로 삼양의 라면 시장을 많이 잠식한 것이다.
이렇게 시장을 잠식 당한 삼양라면은 내부 문제까지 겹치게 되어 이후 농심에게 펀치를 계속 맞게 된다.
이후 농심은 1983년 안성탕면, 1984년 짜파게티, 1986년 신라면을 출시하여 모두 대히트를 쳤다. 이 모든 제품은 지금까지 잘 팔리는 농심라면의 대표상품이 되었다.
라면회사와 관련되어 많은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89년에 이상한 냄새가 나는 우지사태까지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관련된 포스트를 올려 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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